먼저 문체반정이란 정조가 재위하던 시절 조선 내에서 양반들끼리 유행하던 새로운 문체인 패관별체를 배척하고 이전에 기품있던 문체인 고문을 사용하고자 진행한 개혁입니다. 즉, 오늘날로 빗대어 봤을 때 흔히 사용하는 인터넷용어, 신조어등을 사용하지 말고 좋은 우리말을 더 사용하자는 것 입니다. 문체반정이라는 이름은 후대에 이름 붙인 것으로 당시 조선에서는 기사순정 또는 비변귀정이라는 말을 사용해서 개혁을 시작했습니다.
정조가 이러한 개혁을 한 표면적인 이유는 당시 조선의 상황은 대륙의 명말선초의 영향을 받아 여러 소설, 잡서가 유입되면서 양반사이에서 새로운 문체가 유행하자 이것이 유교를 욕보이는 짓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러한 생각을 한 이유는 정조가 성리학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옛 성현들이 작성한 내용을 그대로 외워야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인데, 이 문체반정을 위해서 규장각을 새로 건설하고 대륙으로부터 잡서나 소설들이 유입되지 못하도록 금지해버립니다.
정조의 이러한 옛 문체 중시가 어느정도였냐면 과거시험에서 장원으로 급제한 인물이 작성한 답안지가 패관 문체라는 이유로 순위가 꼴지로 바뀌는가 하면 당시 유명했던 문신 김조순과 박제가, 박지원등도 패관 문체를 사용한 죄를 물어 고문체로 작성한 반성문을 제출하라는 명을 내립니다. 뿐만아니라 성균관에서 공부를 하던 유생들도 패관 문체를 사용한 사실이 적발되면 과거 응시 자격이 박탈되었고, 이 자격은 패관 문체를 교정하기전 까지는 다시 받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 패관문체라는 것이 어느정도 유행한 것이라면 정조의 이런 노력에 힘입어 인기가 사그라들 수 있었겠지만 워낙 전국적으로 유행을 하고 있었던데다가 정조 본인도 요절을 하면서 정조 사후 다시 패관문체가 유행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최근 연구에 따르면 문체반정은 정조가 표면적으로 내세운 개혁일 뿐 실제는 다른의도가 있는데, 단순히 문체 하나가 맘에 안들어서 전국적으로 개혁을 실시한 것은 아니라는 논리입니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면 당시 중국쪽에서 수입되던 패관 문체를 사용한 문학들은 대체적으로 왕정에 위협이 되는 내용이 더러 있었기 때문에 이미 망조의 길에 접어든 조선을 어떻게든 되살려보고자 노력했던 정조의 여러 시도 중 하나라고 봐야한다는 것입니다. 뿐만아니라 남인에 많은 수가 있던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노론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서 문체반정을 펼쳤닺는 주장도 있는데 위에서 언급한 패관 문체를 사용하다가 반성문을 제출한 박지원이나 김조순이 노론계열이었다는 것을 보면 어느정도 신빙성이 있기는 합니다.
또 하나는 정조의 친부인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히는 임오화변이 발생하기 직전에 궁중 화원을 통해 중국역사회모본이라는 책을 지었는데, 이 책은 중국에서 수입되는 금병매, 수호지, 서유기와 같은 중국의 소설들을 소개하는 책이었습니다. 당연히 저자를 숨기기 위해 사도세자 본인의 본명을 사용하지 않고 완산 이씨로 소개했는데, 당시 궁에서는 사도세자가 쓴 책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영조와의 관계가 좋지 않던 사도세자를 본 정조가 친부와는 다른 행동을 해야 하므로 이러한 소설들을 퇴출하는 것이라고 보는 시각도 존재합니다.
또한 작성이 사뭇 진지해야하는 공문서에도 패관문체가 남용하자 이러한 부분이 못마땅했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정조는 성리학자였기 때문에 소설은 애초에 본적도 없다고 이야기한 것을 보면 아마 정조의 개인 취향에 따라 소설류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거기서 신하들을 비롯한 여러 양반들이 모두 패관문체를 사용하니 이 모습이 못마땅했을 가능성도 더러 있습니다. 정조가 문체반정을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연히 이러한 개혁에 반항하는 인물도 있었는데, 여기서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박지원입니다.
패관 문체를 사용하다가 적발되어 반성문을 고문체로 작성하라는 명을 받았지만 박지원은 본인의 죄가 너무커서 반성문을 작성할 수 없다고 반항했으며 이외에도 이옥이라는 인물 역시 패관문체를 지속적으로 사용하면서 벼슬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정조 본인만 패관을 보지 않았지 여동생이었던 청연공주와 청선공주를 비롯해 후궁 의빈 성씨는 소설을 상당히 좋아하는 애호가 수준이었습니다. 당연히 이런 부분은 기록에서도 어느정도 찾을 수 있는데, 당시 왕이었던 정조가 문체반정을 진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궁궐내에 거주하던 여인들은 대부분 패관을 즐겨봤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