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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가 재위한지 약 40년이 다 되어갈 무렵, 영조는 자신의 아들인 이선 그러니까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둔다음 굶어 죽게만드는 일을 벌입니다. 항상 세자를 마음에 안들어했던 영조는 기습적으로 세자 이선을 폐서인한 다음 뒤주에 들어가라고 명했고, 이 명을 따른 세자는 약 8일 후 사망하게 됩니다. 이 사건이 왜 이토록 유명한지 알기위해서는 당시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왕족이 가지는 특별함을 알아야 합니다. 왕족은 귀족계층인 양반보다도 상위 계층으로 역모가 아닌 이상 사사하거나 처형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만큼 특권을 가진 계층이었습니다.
 
게다가 이복 형제도 아니고 종친도 아닌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서 일어난 갈등으로 인해 왕족 중에서도 세자가 사망했다는 것은 당시는 물론 현재도 큰 충격이었습니다. 물론 영조 이전에 왕이 자신의 아들을 사사한 사례가 딱 한건 있기는 한데, 중종이 사사한 복성군의 관계와 영조와 사도세자의 관계는 전혀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복성군은 친모 경빈박씨가 작서의 변을 일으켜 세자를 해하려했다는 정황이 있었고 여기에 복성군이 개입되어 있다고 판단되는 상태였습니다.
 
게다가 중종에게는 왕위를 이을 적통이 있었으므로 복성군을 사사한다고 해서 후계구도가 복잡해지거나 하는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고 추후에 세자가 즉위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미연의 일들을 방지하기 위해서 미리 중종이 손을 쓴 것이라고 이해할 여지도 충분히 있습니다. 하지만 영조에게는 아들이 사도세자 한명 뿐이었으며 임오화변 당시 영조의 나이는 약 70세가 다되었으므로 내일 당장 승하하더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나이였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이러한 처사는 후계구도를 복잡해지게 만드는데 불행중 다행인 점은 당시 왕세손이었던 정조가 있었기 때문에 이런 일을 벌일 수 있었다는 추측도 나오고 있습니다.
 
임오화변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아보자면 당시 영조는 세자를 창덕궁에서 갑자기 불러내는데 이때 세자를 교육하는 시강원과 동궁을 호위하는 호위무사들이 모두 보이지 않는 상태였는데, 이 상황을 보고 사도세자는 자신에게 큰 화가 생길것을 미리 예측하고 아내에게 본인이 학질에 걸렸으니 세손(정조)의 털모자를 달라고 했지만 혜경궁 홍씨는 세손의 것을 어찌쓰냐며 세자의 털모자를 가지고 왔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이는 영조가 아끼는 세손을 이용해 살아보려고 한 것이었지만 아내인 혜경궁 홍씨가 속뜻을 파악하지 못했던 듯 합니다.
 
부름에 응한 세자를 데리고 영조는 경화문을 지나 숙종의 위패가 있는 선원전으로 가는데, 영조는 미신을 상당히 좋아하는 사람으로 평소에는 만안문을 이용했으며 꺼림칙한 일을 할때만 경화문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즉, 세자를 불러낸 것 자체가 흉한일을 하겠다는 선언과 같은데 이후 선원전에서 절을 한 뒤 세자와 창경궁 휘령전으로 간 다음 정성왕후의 신위에 영조가 행례를 하고 사도세자가 사배를 합니다.
 
그 다음 영조가 정성왕후가 본인에게 이야기하기를 변란이 호흡사이에 달려있다고 하였다라고 하며 근위병을 시켜 몇겹으로 전문을 막게하고 총관을 시켜 군사를 배열한 다음 칼을 뽑아 담장을 겨누게 합니다. 이렇게 영조가 아무도 오지 못하게 막자 당시 영의정이었던 신만이 겨우 들어왔다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이런 심각한 분위기 속에서 세자가 영조에게 '제 죄가 많으나 죽어야 할 죄는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이에 영조는 세자에게 칼을 건네며 자결을 명하는데, 세자가 자신의 죄를 반성한다면서 살려달라고 애원해도 영조는 계속 자결을 명합니다. 이에 세자가 자결을 시도하자 마침 세자를 가르치던 임덕제와 춘방의 신하들이 모두 달려와 칼을 치우며 막은다음 세자를 용서해달라고 간언합니다. 하지만 영조는 그들의 말을 듣지 않고 세자의 자결이 실패한 것에 화를 내며 세자를 폐한다는 교지를 내리는데, 이 폐위에 반대하는 신하들을 군병을 시켜 모두 쫓아내고 스승이자 사관인 임덕제 마저 쫓겨나게 됩니다.
 
임덕제는 끌려나간 후에도 세손을 업고와서 세손과 함께 세자를 용서해달라고 간언합니다. 하지만 당연히 영조에게는 통하지 않았고 오히려 임덕제는 파면되어 유배형이 내려집니다. 세자를 폐하는 교지를 읽은 후 뒤주에 들어갈 것을 명하는데, 이때 세자가 들어갈 뒤주는 밧소주방에서 가지고 왔으며 세자는 뒤주에 들어갈 때는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고 들어간 것으로 파악됩니다. 이후 영조는 사도세자의 폐위를 선포하는 전교를 내렸으나 처음에는 사관들이 감히 기록할 엄두를 내지 못했고 뒤주에 갇힌 세자를 감시하는 근위병들 조차 얼마의 시간이 지나면 세자를 풀어주리라고 생각한 것인지 경계가 그렇게 삼엄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뒤주에 갇힌지 얼마되지 않아 근위병들이 풀어주면 잠시 밖에서 바람을 쐬다가 들어갔고 궁인들이 제호탕을 비롯한 여러 음식과 부채를 세자에게 줬습니다. 하지만 영조가 이 사실을 알게되자 격노하여 뒤주를 완전히 묶어버릴 것을 명했고 이때부터 세자는 완전히 갇히게 됩니다. 영조는 이후 매일 한번씩 세자가 있는 뒤주를 흔들어 생사를 확인했는데, 7일차까진 희미하게 대답하던 세자가 8일째 사망하게 됩니다.
 
쉽게 생각해서 세자가 맘에 들지 않는다면 세자를 폐하고 사사하면 될 것을 왜 굳이 뒤주에 갇히게 만든다음 죽게만들었는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한데, 이는 사도세자의 아들인 세손 그러니까 정조의 정통성을 지키기 위한 방편이었다는 시각이 있습니다. 사약이나 교형에 처해진 다는 것은 곧 죄인이라는 의미가 되고 죄인의 아들은 왕이 될 수 없으므로 이를 방지하고 세손의 정통성을 지켜주기 위해 뒤주에 갇혀 굶어죽게 만든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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