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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계혈통으로 왕위를 이으면서 정통성이 부족했던 왕 영조는 즉위 초기부터 선대 왕 경종을 게장으로 독살했다는 게장독살설이 퍼지고 있었고 집권 초기에는 신축환국으로 인해 영조를 지지하던 노론계열 일파가 모조리 쓸려나가면서 상당히 불안정한 기간을 보내게 됩니다. 물론 당시 집권을 하고 있던 소론은 영조가 즉위하면서 상당히 위축되기는 했으나 여전히 권세를 잡은 주요 세력이었는데, 차츰 자기들의 안위가 배제되어 가는 것을 느끼고 경종의 사망설에 대해 강하게 의혹을 제기하기 시작합니다.
 
실제로 영조가 게장을 사용해서 경종을 독살했다는 것은 여전히 의견이 분분하지만 소론은 이것을 이용해 경종의 복수를 갚는다는 명분을 이용하여 반란을 계획하게 됩니다. 하지만 영조는 탕평책을 사용하면서 노론 뿐 아니라 소론도 기용을 했는데, 특히 정미환국이 벌어지고 난 후 이광좌를 비롯한 여러 소론 중 완론 정권이 기용되자 소론을 중심으로 진행되던 반란 계획에도 차질이 생기게 됩니다.
 
여기서 준론은 계속해서 반란을 추진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이인좌의 난입니다. 반란 세력은 충청도와 전라도, 경상도에서 군사를 일으키면 조정 내에서도 분명히 동조하는 자가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하고 도성을 공격하는 동안 영남의 군대가 북진하여 합류하여 도성을 완벽히 점령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진행하게 됩니다. 이때 왕으로 옹립할 대상으로 정해진 사람은 밀풍군이었습니다.
 
이인좌라는 인물은 세종 4남 임영대군파로 남인 명가 출신이었지만 관직에 진출할 수 없었습니다. 이인좌라는 인물이 모든 반란을 계획하고 실행한 것은 아니지만 청주를 함락시키고 경기도로 진군한 이력등을 보아 해당 지역에서는 상당히 크게 항쟁을 했기 때문에 이인좌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외에도 영남군은 정희량, 호남군은 박필현이 맡았으며 군사는 용병과 관군을 회유하여 구성하게 됩니다.
 
반란이 시작되자 이인좌는 청주성을 점령하게 되는데, 이 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장례행렬로 위장하여 관 속에 무기를 챙겨 성안으로 잠입한 다음 기습하여 성을 점령하게 됩니다. 이때 충주성을 지키던 충청병사는 이봉상이라는 인물로 이순신의 직계 후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는 반란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으며 결정적으로 내부에 배신자가 있어 별다른 반항도 해보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청주를 점령한 이인좌의 반란군은 그대로 한양으로 진군을 하게 되는데, 이때 경기도 안성에서 토벌군과 마주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인좌는 토벌군이 직산으로 향했다는 유언비어에 속아 중앙군이 아닌 지방을 지키는 오합지졸로 오인하고 공격을 명령했다가 전력의 열세, 무기의 열세등으로 인해 대패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인좌는 포기하지 않고 산으로 올라가 농성을 시작했으나 큰 효과를 보지는 못하고 산 꼭대기에서 오형망의 토벌군에 의해 사로잡혀 한양으로 압송당한 뒤 참수형에 처해지게 됩니다.
 
호남에서 군사를 일으킨 박필현은 원래 포섭을 했던 인물인 전라감사 정사효가 배신을 하는 바람에 제대로 된 군사행동도 해보지 못하고 붕괴되고 맙니다. 호남 반란군은 읍병을 위주로 구성하여 전주성으로 진군했지만 약속과 다르게 정사효가 성문을 열어주지 않았습니다. 이는 이인좌가 토벌군에 의해 참수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정사효가 배신을 한 까닭인데, 이에 박필현은 무장을 해제하고 경상도까지 도망을 쳤지만 붙잡혔고 그자리에서 바로 참수형에 처해지게 됩니다.
 
가장 오랜기간동안 농성을 했던 정희량의 영남군은 이인좌나 박필현의 반란군과는 다르게 군사의 수도 무려 7만에 이르렀으며 이 군사력을 십분활용하여 주변의 여러 주와 군을 점령하고 충청, 전라지역으로 진출하려 했으나 마찬가지로 관군에 의해 무산되고 맙니다. 다른 반란군이 모두 실패했음에도 지속적으로 버티던 영남 반란군은 거창과 합천, 함양등 4개의 군현을 점령했지만 곧 안동과 상주에서 저지를 당하게 됩니다. 오랜기간동안 버티긴 했지만 결국 관군에 의해 토벌당했으며 정희량은 거창에서 체포되어 참수형에 처해지게 됩니다.
 
반란이 모두 토벌되고 난 이후 영조는 이인좌를 잡아 넘긴 농민 신길만에게는 은 1천과 2품 관직을 하사했으며 반란에 가담했던 주동자들은 모조리 처형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례적이게도 영조는 주동자급이 아닌 하급자들은 모두 살려서 방면을 하는데, 이는 반란을 일으키지 않고 단순히 이름만 거론되더라도 처형을 당하던 시기라 상당히 특이한 경우로 볼 수 있습니다.
 
특히 본인이 원해서가 아닌 반란군들에 의해 왕으로 옹립할 대상으로 정해진 밀풍군은 옥살이를 하던 와중 그를 사사해야한다는 신하들의 상소를 못이긴 영조가 자결을 명하면서 밀풍군은 자결을 하게 됩니다. 이후 영남지방은 가장 끈질기게 농성을 했던 탓에 영조 이후로도 계속해서 반역향이라는 이미지가 굳어있었는데, 이는 남인의 거점인 영남을 경계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으로 분석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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